작년 6월, 르망24시 내구레이스가 열리는 라 사르트 서킷의 그리드에 독특한 모양의 레이싱카가 등장했다. 다른 팀의 레이싱카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가진, 뾰족하게 기수가 튀어나온 삼각형 차체의 이 레이싱카는 마치 SF영화 속 우주선 같았다. 특이하게 생긴 이 자동차의 검게 칠해진 차체에는 하얀 닛산의 로고와 함께 ‘0’이라는 참가번호가 붙어 있었다.
2012 르망24시에 우주선을 닮은 레이싱카가 등장했다.
르망24시 내구레이스(이하 르망24시)는 1923년에 시작된 역사와 권위를 자랑하는 자동차 경주다. 매년 6월에 열리는 이 경기에는 55대의 레이싱카가 참가해 24시간 동안 밤낮없이 달려 누가 멀리 달릴 수 있는지를 겨룬다.
2012 르망24시에 번외 참가한 델타윙
르망24시의 독특한 점은 결승점을 먼저 통과한 선수가 우승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각 팀의 레이싱카는 경기 중에도 몇 차례 피트에 들어가 새 타이어와 연료를 보급 받고, 세 명의 드라이버가 교대하며 경기를 진행하게 된다. 레이싱카는 24시간에 걸쳐 혹사당하며 한계를 시험받는다. 때문에 아우디나 토요타를 비롯한 여러 자동차 메이커는 신기술을 시험하고 차량의 성능을 과시하기 위해 르망24시에 참가한다.
24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달리며 머신 내구성의 한계를 테스트 한다.
공정한 레이스를 위해 르망24시에 참가하는 레이싱카는 엄격한 규정에 맞게 제작되어야 한다. 하지만 최근 르망24시를 주최하는 ACO는 ‘개러지56’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친환경적이고 혁신적인 기술이 적용된 실험적인 차를 규정과 상관없이 번외 참가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우주선을 닮은 레이싱카 ‘델타윙’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56번째 선수로 르망24시에 참가한 것이다. 번외 참가한 레이싱카는 다른 팀의 레이싱카들과 순위를 겨루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서킷을 달리며 르망24시를 지켜보는 전 세계의 관객 앞에서 성능 시범을 보이게 된다는 점에 큰 의미가 있다.
델타윙은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한 독특한 모양을 가졌다.
날렵한 차체에 날개 형상의 스태빌라이저가 더해져 마치 우주선처럼 보인다.
델타윙은 기존의 자동차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에서 설계된 친환경 차량이다. 차체의 모양을 마치 비행기처럼 뾰족하게 디자인하여 공기저항을 크게 줄였고, 무게는 475kg에 불과하다. 독특한 모양 때문에 내부 구조도 보통 자동차와 많이 다르다. 델타윙의 앞 바퀴 폭은 무척 좁기 때문에 마치 3륜 자동차처럼 보인다. 델타윙의 디자인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주행성능이 불안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는 기우에 그쳤다.
정확한 주차를 돕기 위해 실루엣을 그려놓은 델타윙의 피트
독특한 구조 때문에 부품과 타이어도 다른 레이싱카와 다른 것을 사용한다.
사실 델타윙은 닛산이 개발한 차가 아니다. 영국 출신의 레이스 엔지니어 벤 보울비가 공기저항을 줄인 새로운 형태의 레이싱카를 떠올렸고 투자자를 모집해 제작에 돌입했다. 처음부터 델타윙이 친환경차로 디자인 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델타윙의 시뮬레이션 과정에서 고출력 레이싱카용 엔진이 아닌, 절반 수준의 출력을 내는 일반 승용차용 엔진을 탑재하더라도 시속 300km/h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적은 연료로 더 많이, 더 빨리 달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친환경 차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콘셉트다. 결국 르망24시 참가 직전 닛산이 델타윙의 메인 스폰서가 되었고, 델타윙에는 300마력의 닛산 MIG-T 1.6리터 4기통 엔진이 탑재됐다.
충돌사고로 부서진 델타윙. 현장 수리의 어려움으로 르망24시에서 리타이어한다.
미국에서 열린 쁘띠르망 시리즈에 참전한 델타윙
하지만 결국 또다시 충돌사고로 전복된 델타윙
기대를 했던 사람들은 많았지만 2012년 르망24시에서 델타윙은 완주에 실패한다. 차량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코너를 돌던 토요타의 레이싱카가 델타윙에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났고, 현장에서 수리가 어려울 정도로 파손된 델타윙은 리타이어 할 수 밖에 없었다. 델타윙의 불운은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미국에서 개최된 쁘띠르망 경기에 참가한 델타윙이 포르쉐와 충돌해 전복되어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났고, 닛산은 2013년 2월에 델타윙 프로젝트 철수를 발표했다.
전기에너지로 부활한 델타윙
닛산이 발표한 무공해 전기 레이싱카 ZEOD RC
닛산은 지난 6월 23일 르망24시 현장에서 순수 전기에너지로 달리는 레이싱카인 ZEOD RC 프로토타입을 공개했다. ZEOD RC는 Zero Emission On Demand Racing Car, 즉 오염을 발생시키지 않는 무공해 경주용 자동차를 뜻한다.
콕핏을 감싸고 스태빌라이저를 키웠지만 영락없는 델타윙이다.
ZEOD RC의 형상을 본 델타윙의 팬들은 놀라워했다. 뾰족한 기수와 삼각형의 차체는 그야말로 부활한 델타윙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델타윙의 오픈된 콕핏과 달리 유선형으로 디자인된 운전석과 수직 스태빌라이저의 형태가 바뀌었지만, 기본 설계는 델타윙과 거의 차이가 없다.
닛산은 ZEOD RC가 일본, 유럽, 미국의 닛산/니스모 풀 팩토리 인터내셔널 프로그램으로 시행된다고 밝혔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소식이 있었는데, 2012 닛산 델타윙 프로그램의 책임자이자 최근 닛산 모토스포츠 혁신 디렉터에 임명된 벤 보울비가 ZEOD RC 디자인 팀을 이끌게 되었다는 것이다.
르망24시에서 닛산의 목표는 ZEOD RC와 같은 시험적인 레이싱카를 선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궁극적으로 닛산은 시속 300km/h를 넘나드는 세계 최고속 전기 레이싱카를 개발 할 것이고 이 미래의 레이싱카로 르망24시의 최상위급 레이스인 LMP(르망프로토타입)1 클래스에 참가할 계획이다.
닛산은 ZEOD RC를 베이스로 차세대 르망24시 LMP1 레이싱카를 개발할 예정이다.
지난 1월 닛산의 CEO 카를로스 곤은 닛산이 르망24시를 개최하는 ACO(Automobile Club de l'Ouest)로부터 2014년 르망24의 참가 초대를 받았다고 발표했다. ZEOD RC는 해마다 혁신적인 기술을 적용한 자동차를 르망24시에 번외로 달릴 수 있도록 하는 ACO의 ‘개러지 56’ 프로그램에 참가할 예정이다.
ZEOD RC는 내년 르망24시에서 데뷔할 예정이다. 닛산은 장래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내구레이스인 르망 LMP1 컴피티션의 우승에 도전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의 새로운 일렉트릭 드라이브트레인 기술을 시험 중이다.
“닛산은 무공해 자동차 기술 개발의 글로벌 리더를 지향하며, 닛산 ZEOD RC는 차세대 기술 개발과 세계적으로 험난한 내구레이스에서 우리의 LMP1 파워트레인 계획의 가능성을 시험할 테스트베드입니다.” 닛산 모터 컴퍼니 부사장인 앤디 팔머의 말이다.
순수 전기로 달리는 레이싱카를 개발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신기술이 복합적으로 적용될 필요가 있다. 일단 배터리와 모터의 효율성이 무척 중요하다. 단시간에 연료 보급이 가능한 휘발유나 디젤 내연기관과는 달리, 전기 배터리는 충전에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때문에 한 번 충전하면 최대한 많은 거리를 달릴 수 있어야 레이스에서 유리하다.
또한 자동차의 공기저항을 줄여도 배터리와 모터의 효율을 높이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다. 닛산은 전기자동차, 특히 배터리 기술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데 아직 완벽한 레이싱카의 드라이브트레인을 만들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ZEOD RC는 아직 불완전한 드라이브트레인을 델타윙과 같이 적은 에너지로 빠른 속도를 낼 수 있는 공기역학적 디자인을 통해 보완하여 시너지 효과를 내도록 했다.
ZEOD RC는 닛산 리프를 베이스로 업그레이드된 드라이브트레인 기술이 탑재된다.
앤디 팔머는 “닛산 ZEOD RC는 닛산 리프 로드카와 리프 RC 레이스카 프로토타입과 함께 개발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ZEOD RC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된 기술은 미래의 닛산 로드카에도 적용될 것입니다. 순수 전기자동차 시장에서의 판매량을 볼 때 닛산은 글로벌 리더이며, 가장 오랜 기간 동안 배터리 기술을 연구해온 기업으로서 최고수준의 내구레이스를 통해 배울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ZEOD RC 프로그램은 닛산이 르망24시의 LMP1 클래스로 돌아오기 위한 복합적인 기술 개발을 위해 계획되었습니다.
무공해 자동차 기술이 적용된 미래의 로드카는 전기 동력 혹은 내연기관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순수 전기 동력뿐 아니라 아직 연구 중인 또 다른 신기술도 테스트 되어야 합니다. 현재 다른 어떤 자동차 제조사도 오늘날 전기 배터리 기술을 내구레이스에 사용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닛산은 앞으로도 계속적인 혁신, 그리고 많은 정보와 데이터를 통해 미래 스포츠카 프로그램을 위한 파워트레인의 가능성을 평가하고, 앞으로도 일반 도로용 무공해 자동차 기술의 리더가 될 것입니다.“ 라고 ZEOD RC와 닛산의 차세대 전기자동차 개발과의 연관성을 설명했다.
아우디나 토요타는 고성능 하이브리드 레이싱카를 르망24시에 투입해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현재의 배터리기술로는 르망프로토타입 레이싱카가 전적으로 전기에너지만을 이용해서 레이스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닛산 ZEOD RC의 디자이너 벤 보울비는 미래의 레이싱카들이 ‘전기화’ 될 것이며, 현재는 그러한 자동차를 개발하는 과정의 하나라고 믿는다.
닛산은 순수 전기 레이싱카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다.
“우리가 개발하는 이 차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도전적인 테스트베드이며 이는 미래의 로드카 개발을 위한 많은 선택지를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년 르망24시까지 12개월 동안 많은 테스트 프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드라이브트레인을 테스트하고 가장 효율적인 방식을 찾아내어야만 합니다.” 벤 보울비의 말이다.
새로운 형태와 규격의 레이싱카가 인정받기 위해 많은 연구와 테스트가 필요하다.
닛산의 목표는 단순히 전기로 달리는 레이싱카를 개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닛산은 르망24시를 개최하는 ACO와 협력하여 미래의 르망24시에 적용될 전기 레이싱카의 표준을 정하려는 목표를 갖고 도전하고 있다.
“우리는 전기자동차에 대한 많은 사항을 고려하고 테스트했습니다. 테스트 프로그램은 시스템 개발이라는 먼 목표를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ACO와의 파트너십을 통해 최고수준의 레이스를 위한 가장 좋은 방식과 기술표준을 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계의 다른 모든 자동차 메이커가 추구하는 것처럼, ZEOD RC 프로그램을 통해 고도의 공기역학적 효율뿐 아니라, 극한의 성능과 뛰어난 에너지 효율을 모두 이룬 레이싱카를 개발해낼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ACO와 미래의 르망에 적용될 전기자동차에 관한 규정을 협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ACO의 개러지56 프로그램은 미래의 자동차 경주를 위한 많은 부분을 시험해보고 혁신하며 뚜렷한 성과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ACO는 오늘날 가장 진보한 생각을 가진 모터스포츠 프로모토가 되었습니다.“
ZEOD RC는 내년 르망24시를 완주할 수 있을까?
닛산은 미래의 모터스포츠의 패러다임이 전기 레이싱카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그에 따른 기술 개발과 투자를 서두르고 있다. 닛산이 르망24시에 집중하고 과감히 투자하는 이유는 이 대회를 통해 기술을 개발하고, 전 세계인을 상대로 전기자동차의 신뢰도와 브랜드가치를 높이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 같은 닛산의 장기적인 비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닛산의 ZEOD RC는 테스트를 거쳐 내년 여름에 데뷔할 예정이다. ZEOD RC는 과연 델타윙이 남긴 아쉬움을 극복하고 닛산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을까? 어쩌면 근 미래의 탈것이란 존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르는 ZEOD RC가 보여줄 가능성이 몹시도 궁금해진다